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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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는 소련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소련 원수까지 오른 인물이다. 1940년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독소 전쟁에 참전했으며, 1983년 소련 원수로 임명되었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소련군 참모총장 겸 국방 제1차관을 역임하며 냉전 종식을 위한 회담에 관여했으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군 개혁에 반대하여 사임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자살했으며, 사후 그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는 레닌상과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다양한 훈장을 수여받았다.
탐보프 지방 출신으로, 1940년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하급 장교로 참전하며 독소 전쟁을 경험했다. 1943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52년 기갑 전차병 아카데미, 1967년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1981년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1982년에는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소련 최고 소비에트 연방 회의 대의원과 소련 인민 대의원을 역임했다.
'''소련 훈장'''
[1]
웹사이트
Список депутатов Верховного Совета СССР 11 созыва
http://www.knowbysig[...]
2. 생애와 경력
군 복무 중 극동 군관구 참모장(1972), 소련군 참모차장(1974), 참모 제1차장(1979) 등을 역임했다. 1983년 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같은 해 소비에트 연방원수 계급에 올랐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소련군 참모총장 겸 국방 제1차관을 지냈다.
1989년 퇴역 후에는 소련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고문, 소련 최고 회의 의장 고문, 소비에트 연방 대통령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90년 보수 성향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군대 동원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페레스트로이카 노선을 두고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대립했으며,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자살하였다. 그의 유서에는 "내가 인생을 바친 모든 것이 붕괴되고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2. 1. 초기 생애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는 1923년 5월 5일 빈드레이, 당시 러시아 SFSR (현재 모르도비아)의 탐보프 현에 위치한 마을에서 러시아인 혈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재산을 몰수당했고 1940년대 후반 중앙아시아에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는 1928년 남편과 이혼한 후 자녀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가서 크라스니 보가티르 공장에서 일했다.[3]
2. 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40년, 탐보프 지방 출신인 아흐로메예프는 모스크바의 제1 특수 해군 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시작했다. 그는 M.V. 프룬제 고등 해군 학교에 입학했으며, 최근 소련에 점령된 라트비아 리예파야의 발트 함대 해군 기지에서 추가 훈련을 받았다.[3]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독소 전쟁의 동부 전선에서 싸웠다. 특히 레닌그라드 포위전 동안 해병대 소위로 참전하여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쳤으나,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심한 동상에 걸리기도 했다. 이후 그는 M.V. 프룬제 고등 해군 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3]
1942년 5월부터 8월까지는 흑해 함대에서 생도로 복무하며 함선의 포병 부대에서 경험을 쌓았다. 같은 해 8월, 제2 아스트라한 보병 학교에 소위 과정 생도로 입학하여 그해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28군 소속 제197 예비 육군 연대의 소총 소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4] 1943년에는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4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같은 연대의 선임 소총 대대 부관으로 복무했다.[4]
1944년 7월부터는 하르코프와 모스크바 군관구의 최고 사령부 예비대 소속 제14 자주포 여단에서 기계화 보병 대대 지휘관을 맡았다. 1945년에는 붉은 군대 기갑 및 기계화 부대의 고등 자주포 장교 학교를 졸업했다.[4] 전쟁이 끝났을 때 그의 직책은 전차 대대 지휘관이었다.
아흐로메예프는 자신의 전쟁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총 18개월 동안, 저는 기온이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상황에서도 집에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습니다. 두 번의 겨울 동안 밖에서 잤고, 따뜻한 날을 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싸우고, 항상 굶주렸습니다. 게다가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제 나이 또래의 소년들 10명 중 8명이 죽었습니다. 32명의 중학교 동창생 중 저와 제 동창 한 명만 살아남았습니다."
2. 3. 전후 군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6월부터 9월까지 SU-76 자주포 대대 부대대장을 맡았다. 이후 1947년 2월까지 훈련소의 제14 독립 전차 연대에서 전차 대대를 지휘했다. 1947년 2월부터는 아제르바이잔 SSR의 바쿠 군관구에 주둔한 제31 근위 기계화 사단 제14 중전차-자주포 연대에서 ISU-122 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다.[6]
1952년에는 I.V. 스탈린 군사 기갑 및 기계화 부대 군사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졸업 후 같은 해 7월부터 프리모르스키 군관구의 제39군 소속 제190 전차-자주포 연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5년 8월에는 극동 군관구에서 전차 연대를 지휘했으며, 1956년 12월 대령으로 진급했다. 1957년 12월부터 1960년 12월까지는 벨라루스 군관구에서 제36 전차 사단의 부사령관, 참모장, 사령관을 차례로 역임했다. 1964년 4월에는 훈련 전차 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소장으로 진급했다.[6]
1967년 소련군 참모본부 군사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1968년 10월부터 1972년 5월까지 벨라루스 군관구의 제7 전차군 사령관을 지냈으며, 1969년 2월 중장으로 진급했다. 1972년 5월부터 1974년 3월까지는 극동 군관구의 참모장 겸 제1 부사령관을 역임했다. 1973년에는 소련군 총참모부 보로실로프 군사 아카데미 고등 학술 과정을 졸업했다.
1974년 3월부터 1979년 2월까지 소련군 총참모부의 주 작전국(GOU) 국장이자 총참모부 부참모장을 지냈다. 1979년 2월부터는 참모 제1차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2. 4. 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년, 소련군 참모차장으로 복무하던 아흐로메예프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위한 포괄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성공적으로 실행되어 아프가니스탄의 하피줄라 아민 정권은 빠르게 붕괴되었다. 아흐로메예프는 아프가니스탄 점령 이후에도 소련군이 공세를 계속하여 파키스탄 서부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소련이 인도양으로 진출하고 아프간 무자헤딘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7]
당시 젊은 소련 장군들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옹호했으며, 바실리 추이코프, 키릴 모스칼렌코 원수 등도 이러한 견해를 지지했다. 아흐로메예프는 참모차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거의 모든 휴식 시간을 포기하고 업무에 헌신했으며, 카불에서 열리는 군 지휘관 회의에 매일 새벽같이 참석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8]
2. 5. 소련군 참모총장 및 퇴역
1983년 소련 원수로 진급하였다. 이는 참모총장을 역임하지 않고 원수 계급에 오른 유일한 사례였다. 1984년 9월부터 1988년 11월까지 소련군 참모총장 겸 국방 제1차관을 역임했다.[9] 이 기간 동안 아흐로메예프는 냉전 종식을 위한 회담, 특히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 협상에 깊이 관여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당시에는 재해 현장에 군대를 조직하고 배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군대는 방사선 감시, 지역 정화, 오염 폐기물 처리 등에 참여했으며, 아흐로메예프는 이후 군의 활동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10]
그러나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 노선과 군 개혁, 특히 INF 조약에 따라 최신예 탄도 미사일인 SS-23 스파이더를 해체하는 것에 대해 점차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고르바초프와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1988년 11월 참모총장직에서 사임했다.[9]
1989년 2월 군에서 퇴역한 후, 소련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고문을 시작으로 여러 고문직을 맡았다. 1989년 3월에는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Bălți 지역구에서 소련 인민 대표로 선출되었고, 소련 최고 소비에트 위원 및 소련 국방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89년 5월부터는 소련 최고 소비에트 의장인 고르바초프의 고문, 1990년 3월부터는 소련 대통령 고문(군사 문제 담당)으로 활동했다. 퇴역 후에도 그는 소련 국방부 감찰총감 그룹의 감찰관으로 활동했다.[9]
퇴역 후 아흐로메예프는 소련의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소련 인민 대표 대회와 최고 소비에트 회의에서 NATO의 위협을 경고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9] 특히 1990년 11월 14일, 보수 성향의 잡지 《소비에츠카야 로시야》와의 인터뷰에서는 소련 내부의 분열을 막고 사회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만약 누군가 무력이나 기타 위헌적 행위를 통해 국가를 분열시키거나 사회 시스템을 변경하려고 시도한다면, 대통령과 소비에트는 우리의 조국을 보호하고 헌법적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11]
1991년 6월, 대조국전쟁 발발 5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는 당시 소련의 상황이 1941년 독일의 침공 직전과 유사하다며 국가가 파멸로 향하고 있다는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수백만 명의 희생으로 소련 군인과 민간인이 지켜낸 것"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12]
러시아의 정치 평론가 로이 메드베데프에 따르면, 아흐로메예프는 군과 당에서 존경받는 군사 지도자였으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그의 조언을 경청하지 않고 중요한 군사 문제에 대한 결정을 미루는 것에 실망했다고 한다. 메드베데프는 아흐로메예프가 이미 1991년 6월에 사임서를 제출했지만, 고르바초프가 이 문제 처리마저 지연시켰다고 언급했다. 아흐로메예프는 1991년에 모든 공직에서 사임했다.
2. 6. 8월 쿠데타와 죽음
페레스트로이카 노선을 둘러싸고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충돌하였다.[9] 아흐로메예프는 특히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 따라 소련군에서 가장 새롭고 정확한 탄도 미사일인 SS-23 스파이더를 해체하려는 고르바초프의 군 개혁 방식에 불만을 느끼고 1988년 소련군 참모총장 직책에서 사임했다.[9]
1989년 퇴역 후 소련 최고 소비에트 의장 고문, 1990년 소련 대통령 고문을 지냈다. 소련 인민 대표 대회와 최고 소비에트 회의에서 그는 언론을 통해 "NATO에 의한 소련의 빠른 정복 위험"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했다.[9] 1990년 11월 14일, 소련의 보수계 신문 《소비에츠카야 로시야》와의 인터뷰에서는 "당의 분열을 방지하고, 공산주의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킬 수도 있다"고 발언하여 주목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11]
> "나는 내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다. 나는 사회주의적 삶의 방식을 지지한다. 만약 누군가 무력이나 기타 위헌적 행위를 통해 국가를 분열시키거나 사회 시스템을 변경하려고 시도한다면, 대통령과 소비에트는 우리의 조국을 보호하고 헌법적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
1991년 6월 19일, 대조국전쟁 50주년 기념 기자 회견에서 아흐로메예프는 1991년 소련의 상황이 1941년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가 파멸로 향하고 있으며, "수백만 명의 희생으로 소련 군인과 민간인이 지켜낸 것"이 붕괴될 지경이라고 믿었다.[12] 러시아 정치 평론가 로이 메드베데프에 따르면, 아흐로메예프는 고르바초프가 중요한 군사 문제 결정을 미루는 것에 실망하여 1991년 6월 이미 사임서를 제출했지만, 고르바초프는 이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아흐로메예프는 소치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모스크바로 돌아와 쿠데타 지도자들에게 협력하기 위해 소련 부통령 겐나디 야나예프를 만났다. 8월 20일부터 크렘린과 국방부 건물에서 일하며 비상사태 선포 관련 조치 계획을 준비했다.[13] 그는 정보 수집 및 상황 분석을 위한 실무 그룹을 소집했고, 이 그룹의 보고서는 비상 대책 위원회 회의에서 검토되었다. 또한 야나예프가 발표할 보고서 초안을 준비했으나, 야나예프는 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8월 22일,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쿠데타 지지와 소련 해체 방지 조치를 촉구하는 개인적인 편지를 보냈다. 8월 23일에는 소련 최고 소비에트 국방 및 국가 안보 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으며, 모스크바 백악관 공격 계획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14]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자, 아흐로메예프는 1991년 8월 24일 크렘린 집무실에서 목을 매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15] 그의 죽음을 두고 자살과 유서가 조작되었으며 실제로는 살해되었다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특히 자신의 권총 대신 다른 방법으로 자살한 점, 쿠데타 연루 사실 은폐를 위해 살해되었다는 소문 등이 있었다. 육군 대장 발렌틴 바렌니코프는 아흐로메예프와 보리스 푸고의 자살에 의문을 제기했다.[16] 아흐로메예프는 가족에게 보낸 메시지 외에도, "내가 인생을 바친 모든 것이 붕괴되고 있다"는 내용처럼 자신이 평생 헌신한 기관들의 붕괴를 보며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취지의 유서를 남겼다.[17]
아흐로메예프는 모스크바의 트로예쿠로프스코예 묘지에 안장되었다. 매장 직후 그의 묘가 훼손되어 제복의 훈장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으며, 단순 모독 행위인지, 훈장을 팔아 이익을 얻으려 한 무덤 강도의 소행인지는 불확실하다. 훈장은 회수되지 못했고, 며칠 후 같은 묘지에서 두 번째 장례식과 재매장이 거행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소련의 문장과 함께 '공산주의자', '애국자', '군인'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18] 전 합참의장 윌리엄 J. 크로 제독은 아흐로메예프를 "공산주의자, 애국자, 그리고 친구"라고 불렀다.[15]
드미트리 야조프 원수는 아흐로메예프의 자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13]
> "아흐로메예프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말 그대로 사건 속에 있다. 모든 메모, 그리고 그가 목을 맨 리본. 그리고 리본이 처음 끊어졌다는 메모까지... 나는 아흐로메예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확신한다. 나는 세르게이 표도로비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의 나라에 일어난 일에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평가 및 유산
아흐로메예프의 회고록은 사후인 1992년에 출판되었다. 2015년, 러시아 당국은 아흐로메예프가 1978년부터 1991년까지 거주했던 모스크바 모스필모프스카야 거리 11번지 4호 건물 벽면에 그의 명예를 기리는 기념 현판을 설치했다.[19][20]
4. 수상 내역
훈장명 수여 연도/날짜 소련 영웅 1982년 5월 7일 레닌 훈장 (4회) 1971년 2월 23일, 1978년 2월 21일, 1980년 4월 28일, 1982년 5월 7일 10월 혁명 훈장 1988년 7월 1일 적성 훈장 (2회) 1943년 9월 15일, 1956년 12월 30일 조국전쟁 훈장 1급 1985년 4월 6일 소련군 조국 봉사 훈장 3급 1975년 4월 30일 레닌상 1980년 무공훈장 1945년 11월 15일 소련 국경 수호 특별 훈장 스탈린그라드 방어 훈장 1942년 레닌그라드 방어 훈장 1942년 1941-1945년 대조국 전쟁에서 독일 제국에 대한 승리 훈장 1945년 1941-1945년 대조국 전쟁 승리 20주년 기념 메달 1965년 1941-1945년 대조국 전쟁 승리 30주년 기념 메달 1975년 1941-1945년 대조국 전쟁 승리 40주년 기념 메달 1985년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 메달 1969년 소비에트 육군 및 해군 30주년 기념 메달 1948년 소련군 40주년 기념 메달 1958년 소련군 50주년 기념 메달 1968년 소련군 60주년 기념 메달 1978년 소련군 70주년 기념 메달 1988년 군사 협력 강화 훈장 견실한 복무 훈장 1급 소련군 참전 용사 훈장 모스크바 800주년 기념 메달 1947년
'''외국 훈장'''국가 훈장명 수여 연도/날짜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적기 훈장 1982년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사우르 혁명 훈장 1984년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감사하는 아프가니스탄 국민으로부터 메달 1988년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훈장 1988년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훈장, 1급 1985년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1944년 9월 9일" 훈장, 검과 함께 1급 1974년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무장 형제애 강화 훈장" 1977년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나치 독일에 대한 승리 30주년 기념 메달" 1975년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파시즘에 대한 승리 40주년 기념 메달" 1985년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탄생 90주년 기념 메달" 1974년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탄생 100주년 기념 메달" 1984년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불가리아의 오스만 통치로부터의 해방 100주년 기념 메달" 1978년 중국 중소 우호 훈장 1955년 체코슬로바키아 적기 훈장 1982년 체코슬로바키아 1948년 2월 25일 훈장 1985년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30주년 기념 메달" 1974년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40주년 기념 메달" 1984년 쿠바 "혁명군 20주년 기념 메달" 1976년 쿠바 "혁명군 30주년 기념 메달" 1986년 동독 샤른호르스트 훈장 1983년 동독 "무장 형제애" 훈장, 1급 1980년 동독 "GDR 인민군 30주년 기념 메달" 1986년 몽골 인민공화국 수흐바타르 훈장 1981년 몽골 인민공화국 "일본에 대한 승리 30주년 기념 메달" 1975년 몽골 인민공화국 "할힌골에서의 승리 40주년 기념 메달" 1979년 몽골 인민공화국 "몽골 인민 공화국 군대 60주년 기념 메달" 1981년 북한 "한국 해방 40주년 기념 메달" 1985년 폴란드 인민공화국 "무장 형제애" 메달 1988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군사적 공로" 메달 1985년 베트남 군사 공로 훈장, 1급 1985년
소련 최고 소비에트 연방 회의 대의원과 소련 인민 대의원을 지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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Герои Стран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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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хромеев Сергей Фёдорови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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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хромеев Сергей Федорови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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Загадка смерти маршала Ахромеева. Как свели в могилу легендарного офицера, знавшего главные тайны ССС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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Маршал Язов: Горбачев был изменник в полном смысле этого слов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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ЖЕРТВЫ ГКЧ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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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nd's Suicide Saddens Retired Adm. Crowe - Military: 'We grew to be quite close,' former Joint Chiefs chairman says of Soviet Marshal Akhromey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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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ак убивали маршала Ахромеев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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